[박창희 대기자의 직설]
폐선을 더 이상 속이지 마라
폭 11m 땅에 기구 만들고 보행·자전거 길 놓겠다? 포장에 감춰진 돈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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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내팽개친 시민환원 서약서- 서병수 부산시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6·4 지방선거 새누리당 예비후보 시절인 지난해 4월 13일 부산 해운대구 중동 옛 철길 선로에서 당내 경선 후보, 야당·무소속 후보들과 공동공약 협약식을 갖고 있다. 이날 서 시장은 '동해남부선 옛 철길 시민환원'을 위한 공동공약을 발표했지만, 불과 1년여 만에 파기했다. 국제신문 DB |
- 후보 때 시민환원 약속
- 1년 만에 깬 서 시장
- 철도공단에 특혜성 협약
- 공영개발 관심이나 있나
- 폐선을 명품공원으로 가꾼
- 광주 '푸른길' 등 배워라
철길이 굽이져 돌아갈 때는 이유가 있다. 지형에 순응해 열차가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굽이를 트는 것인데, 이를테면 철길의 선형이 감춘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해운대 달맞이언덕 아래 옛 동해남부선 철길에 구현돼 있다. 미포~청사포 옛 철길을 하늘에서 보면 굽이져 돌아가는 모습이 은은한 초승달 같다. 초승달 뜬 저녁, 이곳을 걸어보시라. 거대한 원주율의 묘미에 빠져들어 누구나 사색가, 철학자가 될 것이다.
곡선을 포기하면 직선이 될지 모르지만,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이하 공단)과 부산시가 해운대 옛 철길의 곡선미를 버리고 상업화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머지않아 폐선 위에 '스카이 라이더' 같은 기구가 설치될 테고, 상업시설들이 늘어설 것이다. 보행로와 자전거 길을 같이 넣겠다고 하지만 글쎄, 폭 11m 폐선 부지에 그럴 공간이 나올까. 공단 측 용역회사는 '그린 레일웨이'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속내는 공공성을 밀친 채 돈벌이를 하겠다는 거다. 예견된 수순이라 놀랄 일도 아니지만 배신감이 든다. 이곳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시민들이 폐선에 이름을 새기고, 장승을 세우고, 리본을 달거나 서명을 하며 기원하고 매달렸던 것이 허사였단 말인가.
단언컨대, 이건 기만이다. 목표를 정해놓고 그쪽으로 안 가는 척 가고 있으니 기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6·4지방선거를 앞둔 지난해 4월 13일, 해운대 폐선 부지에서 부산시장 예비후보 6명은 "폐선 부지를 시민 품으로 돌려주겠다"고 하나같이 약속했다. 시민들은 일단 안도했다. 그리고 기대했다. 1년여 만에 돌아온 건 약속 파기요 시민 기만이다. 폐선에 문화와 예술을 입혀 함께 누릴 공동체 공간으로 꾸미겠다며 정책 제안을 하고 아이디어를 보탰던 시민들은 허탈하기 짝이 없다.
폐선 부지가 공단 땅이라 부산시가 관여할 여지가 없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이는, 시 공무원들의 내면에 공고화된 개발 강박증과 오랜 관료주의의 타성을 자인한 꼴이다. 개발시대의 조직, 철학, 사업 방식으로 미래를 열려다 보니 발병이 난 게 아닌가. 애매할 땐 공단을 둘러대고 쏙 빠지려 하는 시의 자세는 옹졸하다. 차라리 '상업개발을 통해 세수를 늘리겠다'고 했더라면 배신감은 덜했을 것이다.
시가 폐선 부지를 끌어안을 수는 없었을까. 국유재산법상 철도 부지를 그냥 차지할 수는 없다. 만약 시가 임차를 하면 임대료가 연간 20억 원쯤 된다고 한다.
광주 '푸른길'처럼 시유지를 대토(代土)해주는 형태로 문제를 풀 수도 있다. 이 경우 시민적 합의가 필요할 것인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런 쟁점을 던져놓고 진지하게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이게 정상적인 시정(市政)이다.
공단과 시가 맺었다는 부속협약서는 굴욕 계약에 가깝다. 시가 애당초 폐선 부지의 공영개발에 관심이 있기나 했는지 의문이 든다. 해운대 미포~옛 송정역 4.8㎞ 구간을 녹지나 수변공원에서 근린공원으로 도시관리계획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한 건 특혜가 아닌가. 더는 감추지 못해 공개한 부속협약서에는 시민의 권리는 없고 공단의 이익만 보장한 내용이 줄줄이 나온다. 이래 놓고 '라운드 테이블'이니 여론 수렴이니 법석을 떨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할까.
부산시는 지금 엄청난 신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시장이 시민들에게 무슨 약속을 지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판에 일부 지역언론사가 끼어 있다는 것도 시로선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얕은꾀로 상업개발을 추진하려 한 시의 자업자득이다. 시는 지금이라도 광주의 '푸른길'이 어떤 거버넌스 체제로 폐선 부지를 시민공원으로 만들었는지, 뉴욕 하이라인이 어떤 노력으로 세계적 명품이 되었는지 연구해보기 바란다.
폐선이 아름다운 것은 낡음 속에 평형과 평화, 시민이 함께 가꾸는 공동체의 꿈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한갓 상업자본에 폐선을 팔아먹을 일이 아니다. 폐선을 더는 속이지 마라.
2015. 5.28. 국제신문